제 701 호 [사설] 새 학기를 맞으며
코로나가 아직 종식되지 못한 채 또 다른 새 학기를 시작한 다. 지난 2년간의 코비드 팬데믹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패러다 임을 생성해내고 변화시켰다. 2016년 다보스 세계 경제포럼 에서 등장했던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다양한 담론 중에 가장 많 은 변화를 요구받았던 대학사회는 코비드 팬데믹으로 인해 다 시 한 번 위기와 변화의 기로에 놓여 있고 그 어느 때보다 생 존을 위한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다. 4차 산업혁명 담론과 함께 대학의 위기와 변화에 대한 사회 경제적인 요구는 각 대학이 교육과정 개편, 다양한 학사제도의 모색, 급변하는 테크놀로 지 환경구축 등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게 했다. 사상 유례없 는 급속한 기술발전을 따라가기 위해 대학교육 현장에서는 안 간힘을 쓰면서도 급속한 기술 변화가 우리 앞에 도래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은 한 학기 만에 전체 교수자가 온라인 교육을 진행하는 기적을 행하게 했다. 일반인들마저도 너무나 금방 언택트와 뉴노멀한 상황을 받아들였고, 우리의 교육현장은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확진자가 폭증하면서 코로나는 다양한 치료제와 백신 개발과 함께 계절성 유행인 엔데믹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 새학기 들어 많은 대학이 그동안의 비대면 온라인 수업에서 대면수 업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 다. 비정상적으로 진행된 지난 2년간 교육현장에서 일어난 변화 와 부작용을 하루라도 빨리 정상화 하는 것이 목전의 중요한 과 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사제관계, 교우관계는 근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학력의 저하, 사회성 함 양능력의 저조, 네트워킹 능력의 결여는 사회 공동체 구성원으 로 지녀야 할 덕목을 갖추는데 심각한 저해 요소가 되기도 했다. 코로나 기간 동안 현실의 장에서 갈등하고 화합하고 문제를 찾 아가는 과정이 생략되면서 현재 우리는 온라인 공간 안에서의 무례, 익명성의 뒤에서 갈등과 혐오를 내재하며 파국으로 치닫 는 인간관계가 더 심화되기 전에 정상으로 되돌려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각 대학이 코로나의 위험성이 상존하지만 어려움을 감 수하면서도 대면강의를 시작한 것은 그동안 누적되었던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가 놓여 있는 시간은 이 전과는 너무나 다르다. 대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과 함 께 비대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용의 가치를 다 경험했기 때 문이다.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세상과 소통하고 모든 것을 처리 할 수 있는 세상의 편리함을 다 경험한 세대가 아날로그적 가치를 위해 편리함을 포기할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현 시점 에서 대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봉착 하게 된다. 근대적인 대학교육의 도입과 함께 대부분의 대학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도제식 지식의 전수부터 기술발전에 대응 할 미래 사회인재를 양성하는 방향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변신 을 꾀했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하고 분화될수록, 기술이 발전 할수록 대학의 존재의미와 역할에 대한 질문은 집요하게 계속 될 것이다. 급속한 고령화, 심각한 학령인구의 감소, 인간의 능 력이 더 이상 기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진 이상 대학 은 이전의 패러다임으로는 더 이상 대학교육의 소임을 다하기 어려워졌다. 코로나 이후 대학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 위에 서있다. 너무나 급변한 세상이 그렇고 사유보다는 기술, 정의 보다는 이익, 현실보다는 가상의 세계, 이해보다는 차별과 혐 오가 더 자연스러워진 상황에서 대학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근 원적인 질문 앞에서 학내구성원과 소통하면서 더 나은 발전을 위해 나아가야 할 때이다.
제 701 호 [기자석] 비교하지 않는 삶
우리는 매일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접하고 산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부터 연락 한번 잘 안하는 친구, 연 락은 하지 않고 맞팔로우만 하고 있는 지인, 인플루언서, 연예 인 등 다양하다. 일상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는 만큼 비교 도 쉽게 하게 된다. 나랑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더 좋은 대학에 간 친구, 취업한 친구들의 연봉, 같은 나이임에도 이미 성공한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많은 협찬이나 광고를 받는 인플루언서, 나보다 뛰어난 형제자매 등 그 대상도 다양하다.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는 때때로 나 자신의 성장을 이끌어내 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더 나은 나 를 꿈꾸고 더 나은 내일을 살고자 노력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친구들과 같이 경쟁하면서 공부할 때 성적이 잘 오르는 경우도 있으며 운동선수들도 다른 선수들과 의 경쟁을 통해 더욱 성장한다. 하지만 상대방과의 비교를 통해 자기발전을 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모방에 그친다면 자신에게 비교가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는 어렵다. 나 역시 상대방과 나를 비교하면서 자 존감이 한 없이 낮아졌을 때가 있었다. 고3입시에 실패하고 재 수를 결심했을 때였다. 나와 같은 조건 혹은 더 열악한 조건 속 에서도 더 좋은 대학에 간 친구들을 보며 왜 나는 저렇게 하지 못했을 까 좌절을 했던 경험이 있다. 다른 친구들이 다니는 학 원에 다니거나 같은 문제집을 써보기도 했지만 결국 수능을 치 르는 나 자신의 노력과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번 2021 미스유니버스에서 1위를 한 인도의 하르나즈 산 두가 경연을 치르면서 한 인상적인 말이 있다. 전 세계의 젊은 여성들을 위한 조언으로 “젊은 여성들에게 가장 큰 부담은 자 신을 믿는 것이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전 세계 에서 일어나고 있는 더 중요한 일들에 관심을 가지세요. 당신 이 당신 삶의 주인공이며 당신이 당신만의 목소리이다. 나는 내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서있다.” 이 말은 가 슴 한편에서 아직도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과 자잘한 비교를 해왔던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내 자신을 믿지 못해 지레 겁먹 고 도전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해내지 못한 일을 다른 사람이 해냈을 때 자신과 가장 큰 비교를 하게 되는 데, 도전을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세상은 어느 때보다도 빠 르게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에 대한 믿음 에서 비롯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또 타인과의 지나친 비교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게 만들고 결국 자신만의 목소리 를 낼 수 없게 만든다. 타인과의 비교 대신 상대방의 차이를 인 정하고 자신의 내면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어느 순간 비 교를 멈추고 당당하게 사회에 나와 주체적으로 삶을 이끌어나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윤정원 기자
제 701 호 [편집장의 시선] 다양한 학내구성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한 해
수습기자라는 딱지를 떼어낸 것이 얼마 전 같은데 이제는 상 명대학보를 책임져야하는 ‘편집장’ 이라는 직함이 아직은 어색 하다. 그러나 대학 언론의 꽃, 학내구성원의 목소리를 대변하 는 상명대학보의 편집장으로 구독자들인 대학구성원들과 몇 가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코로나19. 전 세계를 덮친 이 질병은 학보사에도 영향을 미쳤 다. 20학번들이 처음 들어온 해부터 여러명이 모일수 있는 모임 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학보를 제작하기 위해 거쳐야하는 필수 적인 작업인 편집 회의부터 취재와 신문을 만들기 위해 조판소 에 가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처음 얼마간은 상황을 지켜보았고 대면으로 이루어져야하는 지면발간이 어려워져서 편집회의는 비대면 회의로 대체되었고 지면발행 대신 온라인 발간을 시작 한지 벌써 2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정규발간호가 아닌 호외로 진행을 했으나 코로나 는 장기화되었고 수습에서 편집장이 되기까지 2년 동안 수많은 기사가 온라인으로 나갔지만, 독자와의 소통 폭이 좁아졌 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온라인으로 전달되는 휘발성 기 사로 신문이 발간될 때마다 링크를 걸어 학생들에게 보도를 해도 학생들의 눈길이 잘 닿지 않았다. 기존 재학생은 학보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코로나 19 이후 들어온 ‘코로나 세대’는 학보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학교 홈페이지에서 학내언론사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학우들도 많지 않았다. 독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신문 발행시 발행 시 Web발신에 공을 들였지만 하루에도 수십차려 전달되는 각종 정보의 홍수 에서 학보발간 웹발신을 놓치는 독자들이 너무 많았다. 그 결 과 다양한 콘텐츠들을 소개하며 독자들을 위해 작성했던 의미 있는 기사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점이 큰 안타까움으로 남 는다. 다른 아쉬움은 아이템 선정하는 과정에 학우들의 의견 반영이 부족했던 점이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발생한 등록금 환불 사태, 개강이 시작되면 항상 올라오는 ‘비대면VS대면’ 논 란 등을 독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심도있게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다. 또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 기자들이 직접 학우들과 부 딪히며 소통할 기회가 너무 적었고 학내 취재를 하는데도 많은 어려움이 따라 학교와 관련한 심도있는 아이템을 구상하지 못 한 것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번 호는 다시 지면으로 독자 여러분을 만난다. 신임 편집 장으로서 긴 비대면 기간 동안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던 대학 곳곳의 이야기에 귀를 열고 다양한 학내구성원의 목소리를 대 변하는 상명대 학보를 만들어 보고자 한다. 2022년 선배들의 ‘편집장의 편지’에 쓰여 있던 것과 비슷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다짐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편집장으로서 어떤 위기에서 도 눈 돌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보려고 한다. 편집장 김지현
제 700 호 [영화로 세상읽기-미 비포 유] 우리가 삶을 존중하는 방식에 대하여
미 비포 유(Me Before You) /2016 영화 ‘미 비포 유’는 모든 것을 누렸지만 사고로 인해 전신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윌 트레이너와 작고 한적한 마을에서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던 루이자의 만남을 다룬 영화이다. 일하던 카페가 문을 닫으면서 실업자가 되어 버린 루이자는 새로 일할 곳을 찾던 중 우연히 전신 마비 장애인을 간병하는 일을 지원하게 되면서 윌 트레이너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처음에 삐걱거리고 맞지 않았으나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서로를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윌은 6개월 후 존엄사를 하기로 한다. 루이자는 윌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노력하지만 윌은 루이자를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평생 그녀를 자신의 간병인으로 옆에 둘 수 없었기에 죽음을 결심하게 되며 루이자는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녀만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익숙한 해피엔딩은 윌과 루이자가 사랑에 빠지고 윌이 기적적으로 회복해 둘이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인공이 죽지 않고 두 남녀가 사랑을 이어가는 내용이 아닌 현실적인 선택의 문제를 보여줬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윌이 현재를 거부하는 것은 윌의 삶에 대한 존중이고, 윌 덕분에 용기를 얻은 루이자 역시 자신의 삶에 대한 존중이었다. 결과적으로 윌은 루이자를 통해 삶의 마지막에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루이자는 윌 덕분에 자신만의 삶을 선택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의 결정을 존중하고 삶에 대한 소중함을 보여준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 또한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실패도 하며 의문점이 들 때도 많았다. 이와 같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이 혹은 주위 사람들의 결정과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상대방의 의견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떠한 자세와 태도를 갖추고 있는지 되돌아보면 어떨까? 사랑하는 사람의 결정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느낄 수 있는 영화 미 비포 유(Me Before You)를 추천한다. 김효정 기자
제 700 호 [책으로 세상보기] 자존감 수업
자존감 수업| 윤홍균 지음| 심플라이프 출판| 2016 지금, 당신의 자존감은 안전한가? 작은 일에도 쉽게 지치고 무기력하며 반복적으로 우울하진 않은가? 뭔가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고 회피하는 습관이 있진 않은가? 만약 당신이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할말을 못하고 의기소침하다면, 작은 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느라 시간만 보내고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 친구, 가족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다면 당신의 자존감을 점검해봐야 할 때다. ‘자존감은 정말 회복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분명히 회복할 수 있다.”고 답한다. 저자는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을 자전거 타기에 비유한다. “우리는 자존감에 올라타 중심을 잡고 살아야 할 운명인데, 자존감은 자전거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이 책은 자존감이라는 자전거를 타는 법을 알려주고, 넘어지지 않고 오래 타는 법, 안전하게 넘어지는 법, 착용해야 할 보호장비에 대해서 알려준다.” “자전거를 타는 동안 우리는 분명 한두 번 넘어질 것이다. 자전거를 배운 지 30년이 넘은 사람도 가끔 넘어지고 깨지는 이치와 같다. 하지만 자전거를 일으켜 다시 올라탈 줄 알며, 상처를 치료할 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자전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주 타고 싶고, 애용하며, 즐기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책의 특별한 점은 독자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도록 구체적인 실천법을 소개한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비관적인 사람에게는 <‘괜찮아’ 일기 쓰기>, 집착하는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는 <나를 위한 선물 고르기>, 이별이 무서운 사람에게는 <나쁜 습관과 이별 계획 세우기> 등의 훈련법을 소개한다. 자존감 훈련법들은 모두 사소하고 간단하지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의 유형별로 차별적인 훈련법을 제공하여 높은 효과로 다가온다. 코로나 시대가 지속하면서 외로움과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무기력과 자존감 하락으로 이어지기 쉽다. 저자는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일수록 각자가 높은 자존감으로 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존감이 높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변하면 주변도 함께 변한다. 타인과의 사랑은 개인의 노력만으론 이루어질 수 없지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위태로운 시기인 만큼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어떨까. 높은 자존감은 삶의 만족도와도 직결될 것이다. 신범상 기자
제 700 호 [개교기념] 보도·대학 기사로 돌아보는 2021 교내 변화
2021년 중반 코로나 19 확진 추세가 일부 누그러들면서 대면 수업이 이루어지던 때도 있었으나 변종 바이러스의 출현과 함께 수업 대부분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는 등, 학교를 찾는 학우들의 발길이 줄어들었다. 학우들이 학교에 오지 않은 사이, 학교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보도, 대학면 기사를 통해 2021년 한 해 학교의 변화를 살펴보자. 월별 교내 변화 3월, 693호 2021학년도 양 캠퍼스 학생자치기구 결성 지난 11월, 서울캠퍼스에서는 입후보자가 나오지 않아 선거가 무산되었으나, 올해 3월, 사범대학, 융합공과대학, 문화예술대학 3개의 단과대에서 입후보자가 등록하여 재선거를 진행하였다. 상명대학교 샘물 포털 앱을 통해 온라인 투표를 진행하였고 개표 결과 모두 당선되었다. 천안캠퍼스는 유효득표율 미충족으로 개표하지 못한 총학생회, 글로벌인문학부대학, 융합기술대학, 공과대학, 그리고 입후보자가 없어 이월되었던 디자인대학, 예술대학 중 융합기술대학과 공과대학 두 단과대만 후보가 등록하여 재선거를 진행하였고 모두 당선되었다. 4월, 694호 2021학년도 1학기 총장님과 함께하는 학생회 대표 간담회 4월 28일(수) 오전 11시 서울캠퍼스 대학본부 4층 대회의실에서 ‘2021학년도 제1차 학생회 대표 총장간담회’가 열렸다. 학교 측 대표로 백웅기 총장과 부총장, 기획조정처장, 정보통신처장, 학생경력개발처장, 총무처장. 계당교육원장이 참여하였고, 학생 측 대표로 대의원회 의장, 문화예술대학 학생회장(총학생회 비대위 위원장), 융합공과대학 학생회장(총학생회 비대위 부위원장), 사범대학 부회장, 인문사회과학대학 비대위 부위원장, 경영경제대학 비대위 위원장이 참여했다. 간담회에서는 ‘새로운 학위복’, ‘마스코트’, ‘와이파이’ ‘방역’, ‘교내 홈페이지’, ‘학과 개편’ ‘각 단과대 불편사항’ 등에 대해 논의했다. 5월, 694호 개교기념 축사 2021년 5월 17일 우리 대학은 학원 설립 83년, 대학 설립 55년의 역사를 품게 되었다. 개교기념일을 맞아 해당 기사에서는 이준방 이사장, 백웅기 총장, 이정현 총동문회장의 축사를 실었다. 이준방 이사장은 학교 구성원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 가져야 할 정신에 대해, 백웅기 총장님은 우리 대학을 둘러싼 교육계의 변화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했고, 이정현 총동문회장은 상명인들에게 격려를 전했다. 개교기념호를 맞아 학보사에서는 ‘[기획]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동문을 만나다.’ 등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6월, 695호 천안캠퍼스 상명기독교직원회, 학생들 기말고사 격려 행사 2021년 6월 14일(월) 천안캠퍼스 기독 교수들과 교직원으로 구성된 ‘상명기독교직원회(이하 상기모)’에서 기말고사를 맞이하여 학생들의 학업을 격려하기 위한 행사를 진행했다. ‘상기모’에서는 매 학기 말에 도서관에서 밤새워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격려하고자 샌드위치, 빵, 떡, 우유 등을 제공해 왔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도서관의 정상 운영이 어려워져 올해 행사는 기숙사에서 공부하는 사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는 천안캠퍼스 기숙사 2층에 위치한 카페 파인트리에서 음료수를 후원하고, 학생생활관의 협조로 열렸다. 9월, 696호 2020학년도 후기 학위수여식 개최 2020학년도 후기 학위수여식이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학위수여식은 홍보동영상 시청, 개회사, 국민의례, 학사보고, 총장 축사, 시상, 학위증서 수여, 폐회사, 교가 제창 순이었다. 학위수여식에는 일부 해당자만 참석하였으며, 축사 및 대표자 학위 수여 등을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8월 25일(수) 학교 홈페이지, 상명대학교 공식 유튜브 채널 등에 탑재하였다. 이번 학위수여식에서는 학사학위 807명, 석사학위 162명, 박사학위 50명, 학점은행제 학위취득자 26명이 학위를 받았다. 10월, 697호 제14대 홍성태 총장 취임식 열려 지난 9월 27일 오전 11시 서울캠퍼스 미래백년관 밀레홀에서 제14대 홍성태 총장의 취임식이 열렸다. 임기는 2021년 9월 27일부터 4년간이다. 이번 취임식은 방역수칙을 준수하여 제한된 인원만 참석했으며 대학 공식 유튜브 계정을 통해 취임식 영상을 공개했다. 홍성태 신임 총장은 취임사에서 급변하는 대학 교육의 위기 속에서도 우리 대학을 세계적인 명문 대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며, △원활한 소통과 상호작용 △상명 교육의 집약이자 미래 사회의 중추인 학생을 최우선으로 △세계적인 대학으로 발돋움 △대학경영의 선택과 집중 △대학의 브랜드 가치 제고 등을 약속했다. 11월, 698호 2022학년도 학생자치기구 결성 2022학년도 총학생회 및 단과대 학생회 선거가 시행되었다. 서울캠퍼스는 총학생회 후보 없이 인문사회과학대학, 융합공학대학, 사범대학, 문화예술대학에서 각 한 팀씩 출범했다. 투표는 샘물 포털시스템을 통해 전면 온라인으로 모든 팀이 당선이 확정되었으나, 문화예술대학 '모아'는 선거 운동 부정으로 당선이 취소되었다. 천안캠퍼스는 총학생회, 글로벌인문학부대학, 공과대학, 디자인 대학, 융합기술대학에서 각 한 팀씩 출범했으며, 온·오프라인 융합 투표가 진행됐다. 개표 결과, 모든 팀의 당선이 확정되었다. 12월, 699호 2021 상명대, 다양한 홍보 마케팅과 함께 성장 중 우리 대학 마스코트로 우리 대학 졸업생이 그린 ‘수뭉이’가 선정되었다. 우리 대학의 상징 동물인 사슴을 캐릭터화 한 수뭉이는 11월 30일 2021학년도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에서 관련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온, 오프라인 모두 진행된 이번 행사는 온라인에서 굿즈 이벤트, 퀴즈, 댓글 이벤트 등을 진행했으며 오프라인에서는 컵홀더, 스티커 증정 행사, 돌림판 이벤트, 졸업사진 이벤트, 등신대 설치 등으로 진행되었다. 이외에도 우리 대학이 입시 기간 애니메이션 전공 20학번 박선민 학생이 그린 캐릭터를 활용한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김지현 기자
제 700 호 [편집장의 시선] 혐오로 물든 사회, 이제는 그 연결고리를 끊어야 할 때
혐오표현은 마치 수채화 물감이 종이를 물들이듯 우리 삶을 물들이고 있다. 물들인다는 표현이 의아할 수도 있지만, 우리 일상 속 혐오표현을 살펴본다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한 번쯤 혜지라는 단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혜지는 게임을 하는 여성 유저를 비하하는 혐오 표현이다. 사실 혜지는 한 여성 게임 유저의 이름으로, 혜지라는 유저가 다른 유저에게 의존해 게임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녀를 비난했고 이 일이 커뮤니티 사이트에 퍼지며 어느덧 혜지는 게임을 못하는 여성 유저를 뜻하는 혐오표현으로 변질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혐오가 번져 혜지는 여성 유저 자체를 비난하는 혐오표현으로 심화되었다. 게임을 못하는 유저에 대한 혐오가 게임을 못하는 여성 유저에 대한 혐오로, 더 나아가 게임을 하는 여성 유저 전체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 것이다. 게임을 못하는 유저에 대한 지나친 비난 역시 결코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는데, 심지어 혜지라는 혐오표현이 생겨난 이후로는 이유도 목적도 없이 혐오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처럼 혐오표현은 사람들의 의식을 불선하게 변화시킨다. 이에 그치지 않고 혜지라는 단어는 새로운 혐오표현을 파생했다. 잼민이라는 단어가 바로 혜지와 비슷한 양상으로 생겨난 혐오표현이다. 사람들은 한 번 특정인의 이름을 딴 혐오표현을 만들어내자 너무나도 쉽게 같은 방법으로 다른 혐오표현을 만들어냈다. 게임을 하는 초등학생 유저를 비하하는 혐오표현으로 시작된 잼민은 역시 혐오가 번져 어느덧 초등학생 전체를 비하하는 혐오표현으로 고착되었다. 실제로 잼민은 생겨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등학생을 비하하는 혐오표현으로써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당사자인 초등학생 역시 서로를 비난하고 비하하기 위해 잼민이라는 단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이 단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지 재미있는 어감, 잼민이라고 친구를 놀렸을 때의 반응, 다른 아이들이 사용하니까 유행에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 등을 이유로 이 혐오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설마 친구를 진심으로 혐오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혐오를 함축하고 있는 잼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아이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너무나 쉽게 비난하고 비하하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혐오표현은 결코 온라인 게임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미 너무 많은 혐오표현이 수도 없이 생겨나고, 끝도 없이 번져나간다. 그 일례로 특정 연예인을 비방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뇌충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혐오표현 역시 의미를 확장하더니 어느덧 생각이 없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혐오표현에 이르렀다. 이 단어를 시작으로 특정 단어 뒤에 ‘벌레 충’이라는 한자를 붙여 새로운 혐오표현들이 파생되었다. 10대 청소년을 비하하는 급식충, 매사에 진지한 사람을 비하하는 진지충 역시 그 예다. 이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특정 대상이나 특정 행동에 불만이 생긴다면, 충이라는 접사를 붙여 너무나 쉽게 새로운 혐오표현을 만들어낸다. 이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혐오표현을 만드는 알고리즘까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더 이상 죄책감이나 경각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제 혐오표현의 사용을 지적하는 사람은 되레 예민하고 고리타분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혐오표현은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이끌어낼 뿐만 아니라 집단 간 갈등을 조장하고 심화시키고 있다. 된장녀는 경제활동 없이 부모나 남자게게 의존해 사치를 부리는 여성을 비하하는 혐오표현이다. 이 혐오표현은 2006년 ‘와우코리아’의 신조어·유행어 설문조사에서 사용 부문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만연하게 사용되었던 단어다. 이 단어는 점차 그 단어를 확장하더니 어느덧 여성 자체에 대한 혐오를 내포한 단어가 되었고, 이에 대응하여 사람들은 남성에 대한 혐오를 내포한 한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된장녀에 대응해서 된장남이라는 단어를 쓰던 것이 임팩트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점차 변화를 겪었고, 어느덧 한남이라는 단어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젠더 갈등의 원인이 혐오표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혐오표현들은 서로에 대한 더 많은 혐오를 이끌어내면서 젠더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한 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언어가 가진 힘은 크고, 혐오표현의 힘 역시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다. 혐오표현의 힘은 빠르게 확산되고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한다. 혐오가 낳는 혐오의 연결고리 위에서 우리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타인에 대한 혐오는 처음에는 우리도 인지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장난처럼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혐오에 익숙해지면 어느덧 우리는 그 이유도 모른 채 누군가를 진심으로 혐오하게 될 것이다. 이 연결고리를 끊어내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결국 서로를 미워하고 불신하며 소통하지 않을 것이다. 단절된 사회에서 우리는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혐오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야 할 때이다. 혐오와 갈등을 단기간에 끊어내는 것은 어렵지만, 혐오표현을 끊어내는 것은 우리가 조금만 신경 쓴다면 가능한 일이다. 의식적으로 언어습관을 개선하여 무분별한 혐오표현 대신, 나와 타인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말을 쓰는 것은 어떨까. 우리 한 사람의 언어습관 개선은 반대로 우리 사회를 다시 아름다운 언어로 물들일 수 있는 변화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윤소영 기자
제 699 호 [편집장의 시선] 공정, 이기심의 다른 말
공정, 공평하고 올바름. 2021년 현재, 가장 흔하게 볼 수 있고 뜨겁게 논의되는 단어는 ‘공정’이 아닌가 싶다. 대학 입시, 학교 시험, 취업 등 많은 시험과 선별에서 공정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정을 강조하는가? 불행히도 그 이유는 ‘내 권리를 침해받지 않기 위해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야 하는 상황은 어떨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사실 도덕 교육을 받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내 권리를 위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내 권리가 침해될 상황이 눈앞에 닥쳐도, 우리는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 그렇게 행동하고 있을까?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거북이가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토끼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북이를 토끼와 같은 출발선에 세운다면, 그것은 과연 공평한가? 시합의 주최가 토끼와 거북이의 시합에 어떤 개입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 시합은 공정한가? 반면 ‘돈이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 혹은 더 먼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옳지 않다.’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동의할 문장이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더 먼저 더 많은 기회를 가지게 된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악순환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평한 기회를 얻고, 공정한 과정을 거쳐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공정을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어야 한다.’ 우리는 왜 이 문장에는 선뜻 동의하지 못할까?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역차별’이라 말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가 오히려 다른 사람의 권리를 빼앗는다는 것이다. 세심한 고려와 충분한 논의 없이 정책이 마련된다면, 물론 역차별이 일어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는 단지 내가 얻었을 수도 있는 기회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너무나 쉽게 역차별을 입에 올리고 있다. 심지어는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을 두고도 역차별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내가 손해 볼 것 같은 상황에서는 공정을 주장하고, 내가 이득을 취할 것 같은 상황에서는 입을 꾹 다문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일상 곳곳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일이다. 시험 기출을 모아둔 자료를 흔히 족보라 칭하는데, 대학 시험의 경우 많은 과목이 전년도 문제와 유사하게 출제되므로 족보를 가진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사실 저작권이 있는 시험 문제가 공유된다는 것부터 문제가 될 수 있을 뿐더러, 누구나 가질 수는 없는 족보의 유무가 시험 성적에 영향을 미친다면 시험의 공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내 노력으로, 내 돈으로 족보를 구했을 뿐인데 무엇이 문제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 족보가 답안지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당당할 수 있을까? 내가 이 과목의 족보가 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한 학기 동안 내가 수학한 것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단지 답을 맞혀 높은 성적을 받겠다는 욕심에 답안지와 다름없는 족보를 이용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정당하게 시험을 치루는 다른 학우를 무시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눈에 보이는 상처와 피해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저 묵인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족보가 없을 때는 족보가 있는 타인을 향해 불공평하다 생각하고, 내가 족보가 있을 때는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미 우리 사회는 당당히 공정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나의 침묵으로 타인의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정의를 외면한다. 내가 주장하는 공정이 과연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맞는가? 사실 공정은 공존하지 않는 사회에서 실현될 수 없는 가치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한 채, 나를 위한 공정을 주장할 뿐이다. 내 권리가 빼앗기는 기분이 들 때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그 권리가 처음부터 내게 공정하게 주어진 것이 맞는가? 내가 다수에 속해있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하는 것들, 이루려고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사회의 기준에 따른 것이다. 허울뿐인 가치를 좇기 위해 사람이라는 가치를 외면하지 말자. 공정이 아니라 공존을 외치는 사회에서 우리는 함께 행복할 수 있다. 좁은 시야에 갇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직시해야 한다. 윤소영 기자
제 699 호 [영화로 세상읽기] 떨어지지 않기 위한 부단한 날갯짓
- 영화 <벌새>, 2019(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한 동안 육교를 건너지 못했던 적이 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갈아타야 할 버스를 놓쳐 여느 날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던 어느 날, 꽤 길고 높은 육교를 건너야만 했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타야 할 버스가 불과 몇 정거장 전에 있어 마음이 급했는데도. 그 버스를 놓치면 정말 지각이라, 어쩔 수 없이 육교를 건넜다. 꾸역꾸역. 정말 지옥 불 위를 걷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내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육교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쿵쿵 떨어지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얼른 이 육교의 끝에 도달하기만을 바랐다. 그렇다고 뛸 수도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으니까.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눈을 감은 채로 육교를 건널 수는 없으니까. 결국 그 날 나는 천 리 길 같았던 육교를 건넜으므로 지각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 뒤로도 나는 그 어떤 육교도 건널 수 없었다. 봉사활동을 다니던 장애인복지관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타려면 반드시 나무 바닥이 깔린 육교를 건너야만 했는데, 그 육교는 특히나 내게 공포로 다가왔다. 삐그덕 소리가 나기도 하고, 군데군데 금이 가기도 한 육교. 높기도 높았고, 그 아래는 1번 국도라 큰 차들이 쌩쌩 무섭게 지나다녔다. 끝나는 시간이 늦어 하늘도 어두웠고, 여러모로 그 육교는 내게 너무 무서운 존재였다. 결국 그 봉사는 더 다닐 수 없었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육교를 건너지 못하게 된 것은 수험생에게 가해지는 압박 때문이었다. 성적을 올려야만 내가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는데, 결국 내가 성적을 올릴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압박.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내 미래를 떠올리면 밀려오는 우울함. 눈으로도 볼 수 없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그 감정들이 쌓이고 싸여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신호를 보냈다. 너 지금 우울하다고, 너 지금 불안하다고, 너 지금 위험하다고. 1994년 은희가 느꼈던 감정들은 어쩌면 2018년의 내가 느꼈던 감정들과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은희는 강남 대치동에 살고 있다. 강남, 그 중에서도 대치동은 사교육의 메카로 영화에서도 이곳은 학생들이 엄격하게 자신을 누르고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은희가 하고 싶은 것은 그저 이유도 모른 채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연애도 하고 싶고, 친구와 놀러 다니고도 싶고, 자신을 예쁘게 단장하고 싶었다. 사실 은희의 욕구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사춘기 학생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은희는 이 모든 것들을 가족과 학교에 의해 통제 당한다. 남들은 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공부만 잘하던데, 꾸역꾸역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시도하는 은희는 모두에게 ‘찍히고 만다.’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 고통 받고 있는 은희를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자연스럽게 가족이 먼저 떠오르지만, 은희의 가족은 은희의 마음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심지어 은희의 아빠는 아이들에게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며 기성세대의 가치를 학습시키고, 오빠는 은희가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은희를 때리고는 한다. 은희가 오빠에게 맞는다는 것을 은희의 가족들은 모두 알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오빠를 막아주지 않았다. 오빠의 폭력을 막고, 은희를 구해줄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희를 외면했다. 학교에서 일탈 학생으로 낙인찍힌 은희는 집에서조차 위로받지 못한 채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은희에게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말해준 유일한 사람은 바로 한문 선생님 영지였다. 은희가 다니던 한문 학원에 새로 온 선생님 영지는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랐다. 은희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않았고, 은희와 생각이 다르면 은희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들어주었다. 은희가 대화하고 싶을 때 흔쾌히 곁을 내어주었고, 은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은희가 은희의 삶을 살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런 영지가 성수대교 붕괴로 인해 죽게 되었을 때, 은희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은희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영지뿐이었고, 영지로 인해 은희의 마음에는 새로운 싹이 이제 막 트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소중한 사람이 생긴 은희에게 영지의 죽음은 엄청난 상실과 슬픔, 절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사실 은희의 모습에 내 학창시절을 투영시켜 보던 나로서는 삶의 위로로 상징되는 영지의 죽음이 다른 것도 아니고 다리의 붕괴로 인해 비롯된다는 것이 못내 씁쓸했다. 꼭 내가 건너지 못하던 육교가 결국 무너져 내린 것만 같아서. 은희와 영지가 서로를 위로하며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영화가 끝나기를 기대했는데, 비극적인 결말이 오랜 시간 마음을 아리게 했다. 그렇다면 왜 <벌새>는 영지의 죽음으로 영화의 막을 내렸을까. 아마도 그 답은 ‘사회 비판’에 있는 것 같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는 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다. 그 중에는 등교 중이던 어린 학생들도 많았다. 그런데 사실 이 붕괴는 부실공사와 부실점검으로 인한 것이었다. 당초 성수대교가 건설사의 횡령으로 부실공사가 된 데 이어, 붕괴 당일 서울시가 대교에 금이 간 것을 알았음에도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는 사고에 많은 국민들은 분노했다. 사교육 과열과 학벌주의 역시 <벌새>가 비판하는 사회 문제이다. 아이들은 닭장 속 닭처럼 지정된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할 뿐이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문제를 풀고 또 푼다. 간혹 이 행위에 의문을 품는 아이가 있어도, 그 의문이 저항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저항은 곧 낙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벌새>가 보여주고 있는 이 모든 사회 문제들이 2021년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실공사로 대표되었던 인간의 이기심은 오늘 날에도 다양한 사회 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며, 학벌주의는 오히려 점점 심해지고 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은 앞만 보고 달려 나가고 있다. 어쩌면 감독은 영지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마지막 경고를 전달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의 마지막 위로마저 결국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라고. 윤소영 기자
제 699 호 [책으로 세상보기] ‘우리’의 바깥에는
차별의 언어| 장한업 | 아날로그(글담) | 2018.10.01 한국인은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쓴다. 우리나라, 우리 엄마, 우리 집, 우리 아빠. 하루에도 몇 번씩 입 밖으로 나오는 익숙한 말들이다. 한국인에게는 일상인 이런 말들이 외국인에게는 그렇지 않다. 프랑스어로는 ‘우리 집’을 ‘나의 집’, ‘ma maison’이라 하고 영어로는 ‘우리 엄마’를 ‘my mother’라고 한다. ‘우리 아내’, ‘우리 남편’ 등을 영어로 옮겨보면 더욱 이상함을 느낄 수 있다. ‘our husband’, ‘our wife’, 일처다부제, 일부다처제에서나 쓸 법한 말들이라 혹시 해외에서 이런 말을 쓴다면 이상한 눈초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웃음이 나온다. 그런 ‘우리’를 이 책에서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 ‘우리’를 ‘울타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울타리는 관계 측면에서 속한 집단을 둘러싸 과하면 다른 집단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배척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 우리 밖에는 누가 있을까? 크게는 다른 나라 사람부터 나와 다른 계급, 나와 다른 성별, 나와 다른 학교, 나와 다른 학과, 학번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다른 집단이라는 이유로 관심 범위에서 멀어지고 때로는 공격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이 책에서는 이들 중 나와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이들에 집중적으로 이야기한다. 여기까지 보면 ‘한국인이 다른 나라 사람을 차별한다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른 인종을 향한 인종차별, 거친 욕설 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제목처럼 언어에 담겨있는 선입견, 차별을 지적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민족’이라는 말, 과연 이 말의 기준이 혈통인지를 우리 사회에 모습과 함께 이야기도 하고 ‘다문화 가족’이 지칭하는 대상에 대해서 물음표를 던져보기도 한다. 우리 사회, 다른 국가의 시야도 함께 제시해주어서 읽고 비교하면서 ‘이런 생각이 꼭 정답은 아니었구나.’를 느낄 수 있다. ‘다문화’, ‘세계화’. 이제는 익숙한 말이다. 한국인 누군가가 해외에서 크게 유명해졌다는 말도 자랑스러움에 가슴 뛰기는 하지만, 새롭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때일수록 새로움을 추구하고 나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내게는 익숙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을 괴로움일 수도 있다. 혹자는 최근 사회가 너무 불편한 시선이 많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과한 이야기일 수 있고 어떤 이야기는 거짓이나 비방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고요한 사회보다 서로 문제를 던지고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소외된 이들을 알리고 개선이 필요하다는 외침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이들 하나하나가 켜켜이 쌓여 변화를 만들어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과한 말이나 상대를 비방하는 말 등은 삼갈 필요가 있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분명 함께 살아가지만, 우리의 ‘우리’와 떨어져 관심에서 벗어난 다문화를 재조명하고 또 이들을 ‘우리’ 안으로 들여오기 위해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학우들도 이 책을 읽으며 고인 물에 돌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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